이준석을 옹호하는 언론들… 그의 정치가 남긴 것을 보라

선거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입니다’라는 오래된 슬로건이 연상되는 계절이다. 이 말의 의미는 단지 선거를 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설명하는 것에 끝나지 않는다. 1인 1표의 선거를 통해 통치자, 권력자를 교체하는 정치체제를 의미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념과 가치를 경합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의 정치 행위와 유권자인 시민들의 정치참여 등을 전반적으로 포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정치는, 그리고 선거는 어떠한가. 

‘새로운 정치’를 내세운 이의 ‘더 나쁜 정치’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이들은 움직임이 가볍고, 기성 주류 정치는 한없이 가벼운 입을 보여주며 정치가 가진 무게가 한없이 빠지고 있다. 세상의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데 정치는 세상을 너무 쉽게 본다. 기존 정치의 형편없음을 날 선 언어로 싸움을 붙이면 새로운 것처럼 보이고, 양당에서 윤석열 또는 이재명과 싸우면 정치의 ‘큰’ 리더십으로 마땅히 인정받는다. 이러한 정치의 구도 때문인지 이제는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 계열의 정당 양쪽 모두에 몸을 실었다가 빠져나온 인물들이 용기 있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정치를 시작해, 배지를 달기 위해 이념과 신념 없이 공천권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경우도 태반이다. 그런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분명한 상대와 경쟁을 하는 정치인들은 우리 정치에 필요한 이들이다.

하지만 지금 그 대결 구도 한 편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기존 정치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관련된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이준석의 경우 ‘보수정치에서의 세대교체’라는 새로운 어젠다를 일부 가져오긴 했으나 젊은 ‘연령’을 내세우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정치나 사회 비전은 새롭지 않았다. 

이준석 자신의 몸집을 부풀린 정치방식은 한국 정치를 오히려 나쁘게 만들었다. 그가 세대교체론을 환기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 빼곤 아무것도 없다. 본인이 ‘성역’과 싸운다는 명분을 앞세워 팬덤을 만들 때 주요하게 사용한 방식은 혐오가 분명했다.

이동권을 획득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겠다는 장애인 시민들과 비장애인 시민들 사이의 갈등을 만들고, 강력범죄 피해자 80% 이상이 여성인 한국에서, 여성들이 사회적 안전망을 요구하는 여성운동을 폄훼하며 합의하기 어려운 분노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는 늘 자신이 옳다는 자신만만한 소리를 했다. 정치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정치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실로 가장 정치가 필요한 공간을 찾아가 폐허를 만들고 깃발을 꽂는 방식으로 자신의 인기와 지위를 무기처럼 썼다. 그것도 세대교체라는 참 반대하기 어려운 낯을 가지고 말이다. 

‘말이 칼이 되는’ 정치

때때로 이준석은 자신을 ‘내부총질’하는 당대표로 캐릭터화하며 개혁보수의 위치를 점유하고 싶어하나, 그가 당대표에서 내려와 하고 있는 ‘내부총질’ 역시 혐오가 동반되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인요한 전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에게 영어로 응대해 인종차별의 논란이 일었음에도 사과를 거부한 일이 있다. 그가 자신이 원하는 개혁을 위해 기성 권력과 전쟁을 벌이는 무기로 차별과 혐오를 ‘좀’ 써도 되지 않냐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최악이다. 자신의 소속정당이기도 했던, 여당의 혁신위원장의 한국어 실력을 의심하며 무시하는 태도는 어떠한 잣대로도 긍정적 평가는 어렵다. 

그러나 그는 그를 질타하는 시민들이나 언론을 ‘극악’이라고 분류화하며 자신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말한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게다가 이런 태도는 ‘버릇없는 이준석’ ‘싸가지 없는 이준석’ 등의 연령차별적 반응이 정치권 내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하게 만든다. 그는 늘 이런 반응까지 노리고 말을 한다는 것도 큰 문제다. 그야말로 ‘말이 칼이 되는’ 정치의 표본이다. 정말 이런 이준석의 혐오 정치가 옹호받아 마땅한가?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평가하는 글조차 남기기 싫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향한 언론과 정치권의 해석이 과도하게 긍정적일 때, 상처받는 시민들을 돌아보면 작은 영향력일지라도 함께 마음과 말을 모으고 싶다. ‘이견’이라는 단어 또는 ‘성역’이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해 혐오를 무기로 사용하는 정치는 분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사 대단한 권력과 싸우는 정치일지라도, 그 과정과 결과에서 피투성이가 되는 존재들이 오히려 가장 연약한 시민들이라면 그 정치는 작금의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 사회에 꼭 필요한 정치 행위는 아닐 것이다.

사과와 용서를 모르는 정치가 만드는 미래?

결국 이준석은 국민의힘에서 나와 자신의 정치 행보를 다시 시작 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당내에서 함께 했던 ‘천아용인(천하람, 허은아, 김용태, 이기인)’ 중 김용태는 당에 잔류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이준석과 함께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다른’ 국민의힘을 만들기 위해 손잡았던 동료들도 서로 조금씩은 다른 방향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국민의힘을 떠나며, 이준석은 시민들에게 자신의 정치에 투자하기를 요청했다. ‘미래로 가자’며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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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꿈꾸는 미래에 투자하고 싶지 않고, 그 손짓에 호응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정치를 가지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준석의 정치가 소외시키고 배제시킨 시민들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행되어야 그가 하겠다는 ‘빼놓지 않는 정치’가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후안무치는 결코 ‘기대주’의 언어가 될 수 없다.  

그가 중시하는 진영논리를 넘어선 이견이 통하는 사회, 충분히 토론하며 의견을 나누는 사회가 필요하고 훌륭한 것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 타인의 실수 또는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은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토론이 중요한 이유는 아주 상반된 의견들의 접점을 찾아내고, 서로의 한계를 발굴하며 더 나은 합의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 아닌가. 그러나 이준석의 정치와 그의 정치를 추앙하는 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의견 개진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해도 비아냥이 비판이 될 수는 없다. 음모론을 키우는 선동은 공공선을 만드는 노력을 우습게 만든다.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는 이 지점에서부터의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는 많은 정치인들이 초대할 ‘정치의 공간’은 더 다양한 시민들의 삶의 회복을 위해 지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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